터키의 와크프(재단) 전통, 그 역사와 현재
터키의 나눔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는 오스만 시대에 황금기를 누린, 와크프(재단) 전통이다. 아랍어인 waqf(와끄프) 의 단어 자체의 뜻은 ‘멈추다’, ‘멈추게 하다’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재산을 기부하여 설립되며, 그 순간부터 그 누구의 재산도 아니게 되며(재산임을 멈추며) 특정한 목적으로 공공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일회성 기부가 아닌 지속적인 형태로 자선을 베풀 수 있도록 고안된 기관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관들은 어떻게 설립되며, 어떻게 지속적인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일까?
와크프를 만드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2개로 나뉠 수 있다. 자신의 건물이나 토지 등 재산의 전체 또는 일부를 와크프로 선언하거나[i], 국가의 재산 중 일부를 와크프로 쓸 수 있도록 요청을 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경우이다. 두 방법 모두에 있어서 최우선이 되는 것은 자립적인 금융구조를 형성하고, 와크프의 수혜자와 확실한 목적을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그 목적과 법에 따라 와크프를 관리할 신탁 관리자나 그 위원회를 지명하는 것이다. 그리 하여 지속적인 자선을 베푸는 와크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10개의 가게가 있는 사업가가 고아들의 교육비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자선을 하고 싶어한다고 하자. 그의 재산 중 일부를 꾸준히 기부한다면, 그가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고아들의 교육비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속성은 불투명할 수 있다. 그 대신에, 그의 가게 중 하나를 와크프로 지정하고, 신탁관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목적인 고아들의 교육비 지원을 공식 지정한다면 어떨까? 관리 위원회는 여러 사람으로 구성된 브레인이기 때문에, 와크프로 지정 된 가게가 꾸준히 이익을 낼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릴 것이고, 축적한 부는 없으나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 가게가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도록,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최소의 급여를 받으며 일할 것이며, 가게는 더 많은 이익을 내어 더 많은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이고 그 지속성도 보장될 것이다.
이렇듯 와크프는, 자선을 베풀기 위해 토대가 되는 씨앗을 기부하여 와크프가 발전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힘을 쏟고, 그 목적이 잘 이행 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와크프로 선언한 후, 그 결정은 되돌릴 수 없었으며, 와크프를 선언한 사람이 법원에 가서 재산을 다시 소유하려 한 경우, 법원은 와크프가 반환, 매매, 기부가 불가하다고 판결하였다. 와크프의 목적이나 형태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경우에는, 이슬람 법과 재단의 목적에 합당한 경우에는 신탁 관리자가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다른 경우에는 판사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특히 자금의 유용등 와크프의 부적절한 관리는 매우 큰 죄악으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당대 사람들은 아무런 개인적 이익도 추구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땅, 농장, 집, 사업과 저축으로 지속적인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천, 수만이 넘는 와크프를 만들었다.[ii] 이슬람의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iii], 사람이 죽으면 그가 이룬 연구적인 성과, 기도해줄 자식 그리고 베푼 자선만이 남는다는 가르침이 이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앙적인 가르침을 토대로 자선을 베푸는 와크프는 오스만 제국 내에 다양한 분야에서 NGO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와크프의 진출 분야는 아주 다양하였다. 와크프가 의학 대학을 설립하였다면, 대학 건물과 그 도서관을 짓거나 와크프로 선언하였고, 의술로 얻어지는 수익으로 의사들의 봉급이나 학생들의 장학금, 약품이나 도구 등의 지출을 충당하였다.[iv] 에디르네에 있는 베야지드 콤플렉스를 예로 들자면, 의사가 21명, 정신과 치료를 위한 음악치료사가 10명 그리고 그 밖에 일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 의학 연구와 병원의 역할을 병행하였다.[v]
오스만 제국 시기에 26000여 개의 와크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vi] 1527년에 오스만 제국의 경제활동에서 와크프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2%였으며, 18세기말에는 이 수치가 1/3에 육박하게 된다. 또한 당시에 여성의 사회참여와 사회적 위치가 상당하여, 와크프들의 40% 정도는 여성들이 자신의 재산으로 형성한 것이었다.[vii]
오스만 제국은 패권을 지니고 있던 6세기 동안, 와크프를 통한 자발적인 부의 이동으로 인해 가난을 뿌리 뽑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 활동들을 중앙에서 하지 않고, 시민사회에서 해왔기 때문에 보다 효과적이었고 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으며 작은 정부를 이루는 배경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보안과 정의 그리고 국경의 수비를 맡았으며 그 외 상당한 부분을 와크프들이 도맡아 행하였다. 오스만 정부는 와크프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상당한 양의 세금을 희생하였다. 그런 편의를 제공하고 또한 와크프 활동들이 질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눈여겨보았다.[viii] 와크프의 수익과 지출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되었으며, 이 꼼꼼함 덕에 통계 자료를 낼 때, 오스만 제국만큼 완벽한 통계자료를 가진 국가를 역사 속에서 찾기 힘든 것이다.[ix] 이 자료들 대부분은 조심스럽게 기록보관소에 기록되어 있고, 현재도 연구자들을 위한 1차 자료로 활용 중이다.[x]
와크프가 담당하던 영역은 가난과 빈곤에만 극한 되지 않았다. 와크프들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거의 모든 영역에 있었다: 혼자 사는 이들, 여행객들, 성지순례객들, 고아들,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일자리 지원, 예술가 후원, 빚을 진 이들의 파산 면책, 결혼 자금 마련이 힘든 커플들, 철새들을 위한 보금자리 마련, 과부 돌봄 서비스, 배고픈 이들, 아프고 몸이 불편한 이들, 의학, 스포츠와 교육 프로그램, 사원들을 위한 양초 만들기, 환경 운동, 도로 포장, 길거리 등 설치, 주민의 세금 대납, 은퇴한 선원 돌봄 서비스, 희귀한 장미 재배에 보조금 지원, 양치기, 수감자들, 가난한 집 아이에게 장난감을 나눠주는 등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역에서 아주 구체적인 자선을 행하였다. 이 밖에도 필요한 건설을 하고 와크프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공공 시설, 보도, 등대, 횡단보도, 묘지, 병원, 공중목욕탕, 분수, 사원, 기숙사, 여관, 케르완 사라이, 데리위시 여관, 다리, 수로, 도서관 등…
기부에 있어서 이슬람의 기본 철학은 익명성과, 가식을 피하는 것, 순수한 의도 그리고 도움을 받는 이가 느낄 수 있는 정신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xi] 이 섬세한 철학들이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부의 돌’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선을 베풀고 싶은 사람은 사원이나 메드레세 등의 구석에 위치한 2미터 정도 높이의, 잘 보이지 않는 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기둥을 통해 (주로 밤에) 돈을 남겨두고, 이것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자신의 필요 양 만큼 가져가고 나머지를 제자리에 넣는 형태가 바로 기부의 돌이었다. 이는 그 사회가 어느 정도 수준의 연대와 결속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흔히 인용된다.
결과적으로 와크프는 오스만 제국에서 정부와 사회의 중간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어, 사회 통합•협력뿐 아니라 정부와 사회 사이의 신뢰를 쌓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다른 말로 와크프는 사회 곳곳에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아, 수입이 골고루 분배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뛰어난 구조였다.
현대 터키에서의, 이를 대표하는 가장 단적인 예는 바로 히즈멧 운동이다 히즈멧은 봉사자들의 움직임이다.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 소통 그리고 사회적인 연대를 통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인 운동의 영감의 원천은 이슬람 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페튤라 귤렌 선생이다.. 그가 쓴 책들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것은 재단 설립의 의미를 가지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과 “살리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귤렌 선생은 전국을 다니며 한 설교에서 터키인들 스스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오스만 제국 시대의 여러 사례들을 가지고 재단의 설립과 지속성을 터키 사람들로 하여금 상기시켰으며 이를 근대성과 접목시켰다.
히즈멧 운동은 초기에 교육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 학원을 설립하고 장학금을 제공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터키 전역에서 지지를 받으며 전국민적인 교육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i] fgulen.com
[ii] Yediyıldız, Bahaeddin. Place of the Waqf in Turkish Cultural System. Translated by R Acun and M Oz. Istanbul: Secon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Human Settlements (Habitat II), 1996
[iii] Qur'an, 55:26-27
[iv] Maksudoğlu, Mehmet E. "Osmanlı Vakıf Uygulamasından Bazı Örnekler" Diyanet Ilmi Dergi, 2003
[v] Maksudoğlu, Ibid.
[vi] According to the findings of Ekrem Hakkı Ayverdi (in The Ottoman Architectural Artifacts in Europe), there were 3339 Turkish waqf buildings in Bulgaria in 1982. Of these 2356 were small and large mosques, 142 universities, 273 bridges, 16 caravanseraies and the rest consisting of baths (hamam), tombs, fortresses, public fountains, libraries etc. (Yediyıldız).
[vii] Yediyıldız, Bahaeddin, Ibid.
[viii] Eminoğlu, Kamil. "Osmanlılar'da Vakıf Anlayışı." Sizinti 8, no. 90 (1996)
[ix] Crecelius, Daniel. "Introduction."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38, no. 3 (1995): 249.
[x] Akgunduz. Akgündüz, Ahmet. "İslâm Hukukunda ve Osmanlı Tatbikatında Vakıf Müesseseleri", Ankara: Türk Tarih Kurumu Basımevi, 1988.
[xi] Qur'an, 2:26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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