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렌 단체
방크 아시아
현재 방크 아시아 (Bank Asya)는 터키의 네 개의 “참여형 은행” 중 가장 크다.[1] 이 은행은 1996년, 터키 전국의 346명의 사업가들이 은행 주식을 취득하고 터키 재무부로부터 무이자 은행 개설에 (처음에는 금융회사로 불려짐) 허가를 받으면서 문을 열었다. 그 당시 방크 아시아는 그런 6개 은행 중 하나로 아시아 금융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한 은행이 파산하고 두 개가 합병하면서 현재와 같이 네 개로 남고, 방크 아시아는 30%의 시장점유율 가진 최대 은행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크 아시아가 귤렌 은행이라 불릴 수 있을까? 1990년대 초반에 귤렌은 일부 사업가들과 무이자 은행 개설이 좋은 발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전 1983년에 오잘 대통령은 돈을 이자가 붙는 계정에 예금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무슬림 터키인을 위해 무이자를 바탕으로 하는 특수 금융회사를 설립하는 법에 서명했다. 오잘 대통령의 친구였던 귤렌은 이 법을 지지하고 원래의 사업가들이 그런 은행 개설계획을 추진토록 독려했다. 이런 사업가중 일부는 귤렌의 설교와 저작물에 감명을 받았지만 346명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어떤 이는 귤렌의 사상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업적 이득을 고려하여 지지하였던 것이다. 귤렌은 은행 개막식에 참석했고 함께 참석한 원래의 주주들과 사진을 찍었고, 이에 따라 언론을 통해 이 은행이 귤렌 운동과 관련된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일부 주주만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고 많은 주주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 귤렌 학교와 병원에서 은행 업무와 관련하여 방크 아시아를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터키 은행들간의 경쟁입찰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예컨대 은행장 우날 카바차는 경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은 귤렌 사업만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어 영역 확대를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했던 것으로, 예를 들어 귤렌 기관인 파티 대학교는 오랫동안 국립은행과 거래를 해오다가, 방크 아시아가 수업료 징수방식을 개발하여 대학의 이사진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방크 아시아와 거래를 시작하였다. 은행은 학생 가족에게 신용 카드를 발급해서, 그들이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디에서나 매달 수업료를 내도록 하였다. 이 수업료 신용 카드는 터키의 가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은행은 신용 카드 서비스를 귤렌 학교뿐 아니라 관심을 가진 사립학교 모두에 제공한다. 수업료 신용 카드의 성공으로, 이 은행은 현재 여러 지역의 대학 등 많은 교육기관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초의 주주중 많은 사람들이 은행 주식을 매각하여, 현재 주식의 30%만 원래의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이 은행은 대중은행으로, 은행 주식을 취득한 여러 개인과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다. 귤렌에 고취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운동에 회원 목록이 없으며 또한 가입 관계는 순전히 개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크 아시아 이사회의 현 회장은 부유한 사업가로, 몇 개의 선박회사를 가지고 있고 여러 귤렌 사업을 지원하며 한 때는 파티 대학교의 이사회에 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귤렌 운동의 지지가 회장 직책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귤렌과, 은행 이사진, 은행 직원, 은행 고객간의 공식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3년마다 외국인 투자가를 포함하는 주주총회가 열려 사장과 이사진을 선출한다. 대부분의 주주는 귤렌이나 귤렌 운동에 대해 들어 본적이 없으며, 은행장 카바차는 귤렌 정신과 이념이 은행에 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은행장은 은행의 돈에 이자가 붙지 않는다는 점에서 방크 아시아가 “이슬람 은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한편, 은행은 돈에만 이자를 붙이는 일 대신, 실제 상품 거래에 투자하고 있다. 또한 은행은 도박이나 주류 관련 자금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 종교 이외의 이유로 은행의 복리 이자 계산방식에 반대하는 기독교인, 유대인 등 비무슬림 사람도 특히 그들의 사회적 가치관이 은행과 맞는 경우 이 은행에 돈을 맡기고 있다. 또한 12년 전의 설립 시점과 비교, 자본금을 7-8배로 늘리는 등, 은행의 경영성과가 좋았다. 2007년 방크 아시아는 51%의 순이익을 달성했으며, 50억불의 당좌예금과 함께 이익배분 구좌의 자금이 47%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그런 재무적 성공에 힘입어, 이 은행은 세계적으로 개인과 기업 투자자를 모을 수 있었다.
2002년 터키의 금융위기 기간중 대부분의 은행은 국내외 어디든 건설회사에 투자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 은행은 여기에 투자 기회를 포착하고 걸프 지역과 아프리카에 있는 많은 건설회사를 지원했으며, 이런 투자는 은행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주고 또한 세계 경제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게 하였다. 현재 많은 주주가 미국과 유럽의 기관 투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50억불의 예금중 약 20억불은 개인, 나머지 30억불은 기업으로부터 이뤄진 것이다. 터키의 참여형 은행은 터키에서 현재 3.2%라는 미미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지만 2001년 1.1%에서 성장한 것이며, 3년 내에 10%의 시장 점유율을 가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요약하면 귤렌이 처음부터 무이자 은행개설 발상을 지원하고 사업가들이 그런 은행을 개설토록 독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귤렌과 방크 아시아 간의 공식적인 관계는 전혀 없었다. 최초의 주주 일부가 귤렌과 그 이념에 고취되었지만 전체 346명의 주주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며, 은행이 더욱 성장하고 시장에서 성공하여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 모으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줄게 된다.
사만욜루 TV
1980년대에 귤렌은 책임지는 미디어 (신문, 방송 등)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1989년 그는 이스탄불에 있는 20명의 사업가를 만나 뉴스를 균형감, 객관성,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보도하고, 성적 표시나 폭력을 자제하면서 가족 지향을 강조하는 프로그램 방영할 TV 방송국 개설을 검토했다. 이 모임의 참가자는 그런 방송국 개설의 착수 비용을 약 $250,000로 추정했으며, 최초 자본금을 준비하기로 합의하여, 사만욜루 (Samanyolu) TV, STV가 1993년 1월 13일에 창설된다. 하지만 새 방송국 개설 비용은 당초 예상보다 약 4배로 더 들어, 초기 6-7년 동안은 자체 수입으로 유지할 수 없었으며, 이에 귤렌 운동에 참가하는 지역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4-5년을 거치면서 방송국은 주로 광고수입에 힘입어 점차 자체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2004년부터는 지역의 지지자로부터 지원이 필요 없게 된다.
현재 광고수입은 전체 운영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하며, 현재 이 방송국은 프로그램과 방송 시설을 확충할 정도의 이익률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의 프로그램에는 드라마, 스포츠, 코미디, 리얼리티 쇼, 요리 프로그램, 어린이 프로그램, 24시간 뉴스 등이 있다. 이 방송국의 홍보이사인 카라카스에 의하면, 사만욜루 TV가 다른 터키의 TV 방송국과 차별화되는 점은 모든 프로그램에서 가족 지향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귤렌 운동의 목표인 문화간, 종교간 대화를 추진하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하나는 “누구 없어요?” (킴세욕무)로, 2004년 이스탄불의 지진을 주제로 방영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폐허로 변한 구역에 들어간 구조 대원은 “누구 없어요?”라고 힘없이 부르짖는 한 여자아이를 구출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 두 가족이 나오며, 부자 가족은 가난한 가족이 지진 후에도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 방영 결과, 지진 희생자를 돕기 위한 헌금이 방송국에 쏟아져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터키와 세계의 지진 및 기타 재해를 구호하기 위해 비영리 구호단체인 킴세욕무가 창설되었다.
이 방송국의 요리 프로그램인 “풋사과” (예실 엘마)는 터키의 동종 프로그램중 1위를 차지하였으며, 시리즈 쇼인 “테크 투르키예”는 2008년에 터키에서 시청률 1위의 쇼가 되었다. 2,500개의 다른 측정기준으로 방송국을 평가하는 영국 방송 시청률 조사 기관인 AGB는 1998년부터 광고주들에게 사만욜루 TV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방송국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위성을 통해 다른 언어로 방송한다는 사실은 많은 국제적 사업에 호소력을 발휘하였으며, 이 방송국의 광고에 광고주들이 활발히 참여하여, 결과적으로 방송국은 흑자 기업이 된다. 현재 이 방송국의 년간 예산은 약 3천6백만불이다.
자만지
1980년대 중반에 귤렌과 그의 이념을 지지하고 있었던 그의 주변 사람들은 포괄적으로 다양한 이념적 관점을 제시, 보도할 수 있는 신문사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이런 신문은 최신 뉴스를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집단간 증오보다는 대화와 관용을 강조하며, 광고에서 술 종류나 나체는 자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986년, 귤렌에 고취된 일단의 사업가는 그런 목적을 가진 신문사를 훌륭한 벤처 사업으로 생각하면서 신문의 주식을 사들여 자만지 (Zaman)가 창설된다.
창설 시부터 신문을 소유하고 관리했던 사람들은 미디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업가들이었다. 최초 주주의 일부가 귤렌에 영향 받고 고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귤렌 자신은 신문사의 재정이나 관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귤렌이 자만지에 매주 금요일 칼럼을 기고하는 것 이외에는 이사회나 기업 구조에 참여한 적은 없다.
자만지의 주필인 에흐렘 두만르 (Ehrem Dumanli)는 다음과 같이 신문의 목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 수준의 신문 제작을 추구한다. 새로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선전하는 투의 신문이 아니라 세계 수준의 신문을 말한다. 다른 신문과 경쟁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자만지가 최고의 신문이 될 수 있도록 기자들에게 최고의 뉴스를 가져오라고 독려한다.” 창설 22년이 되는 현재, 자만지는 터키에서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가지고 있고, 일일 평균 유료 구독이 760,000부에 달하며, 일일 전체 구독자는 2백 5십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독 신문을 함께 보는 사람과 가판대에서 구매하는 사람을 포함).
자만지와 영문판 자만 투데이 이외에도, 주간 잡지, 통신사를 가지고 있는 더 큰 조직인 ‘미디어 그룹’이 있다. 2007년 미디어 그룹의 수입은 약 2.5억불로 절반 이상이 구독료에서 나왔다. 신문의 경우 구독료보다는 수입의 50% 이상이 광고에서 나오며, 광고는 주로 귤렌 운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많은 대중에 선전하려는 주요 사업체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두만르 주필은 “이 업체들은 단지 사업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우리 신문을 그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자만지는 독자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주에게 이익을 주는 사업이다. 현재 자만지의 최대 주주는 터키의 부유한 직물 제조업체 사장이며, 현 이사진 중 몇 명이 귤렌 운동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그는 말하면서, 이사진은 운동과는 상관없이 터키의 미디어와 사업체의 지도자 중에서 선정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신문에 귤렌 이념이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이 주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귤렌 이념의 공유 없이는 신문 제작은 불가능하다. 다른 신문에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문화와 종교간 대화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념적이며, 우리는 칼럼에서 다양한 의견을 반영코자 노력한다. 의견란은 모두에게 개방되며 사람에 대한 증오는 포함되지 않는다.” 칼럼 기고가는 우익과 좌익 모두에 있으며, 어떤 사안에 대한 견해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종교나 인종과는 관계없이, 자유로운 의견 표현은 신문사의 정책으로 강력하게 보호되고 있다. 이런 언론의 자유 수호를 통해 자만지가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자만지 직원이 귤렌 이념에 접하게 하는 “귤렌 수업”이나 제도는 없지만 귤렌의 기본 사상인 대화, 관용,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와 포괄주의에 대한 신념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존재한다.
재무 투명성은 자만지 운영의 필수적 요건이다. 매년 정부는 모든 신문사의 재무상태를 조사하며, 재정 운영이나 투명성과 관련 위반사항을 발견하면, 신문은 폐쇄되거나 벌금이 부과된다. 22년간의 역사에서 자만지는 엄정한 재무 감사에서도 위반사항이 발견된 적이 없다.
요약하면, 최초 주주의 일부가 귤렌 이념에 고취되었고, 그가 신문사 창립을 독려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만지는 귤렌 신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화, 다양한 의견의 표현, 사람에 대한 증오의 자제에 대한 귤렌의 믿음을 신문은 옹호하고 있다. 한편 신문의 광고는 나체, 술이나 범죄와 관련된 사항은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귤렌 운동 간에는 아무 재무적 관련이 없으며, 신문사는 주주에 이익을 주는 벤처 사업인 것이다.
기자 작가 재단
1994년 이스탄불 방문중 귤렌은 일단의 언론인과 작가를 만나 특히 문화간, 인종간, 종교간 대화와 관련하여 그들이 대중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언급은 간혹 무력 분쟁까지 초래한 터키 지식인들간의 심한 대립 이후 10년여 만에 이뤄진 것이다. 터키내의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급진적 종교집단의 격심해지는 대립과,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잔인한 전쟁은 귤렌이 문화간, 문명간, 종교간 대화가 터키와 세계에서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귤렌은 이들이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고, 이런 목적에 전념할 재단을 설립하도록 고취했다.
1994년 6월, 귤렌을 종전에 만나 그의 대화를 위한 재단설립 비전에 동감했던 핵심 언론인들과 작가 그룹은 기자 작가 재단을 설립하고 이스탄불에 본부를 두었다. 귤렌은 재단의 명예회장으로 일하는데 동의하고, 초기의 약 10년 동안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재단의 중심에는 ‘아반트 회동’가 있어,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의견 및 참가자들이 공유하는 기본적 인간의 가치를 토의하는 대화의 장이 되었다. 예컨대 이 모임에는, 다양한 지식, 종교 배경을 가진 터키인들이 함께 참석했다. 이들은 무슬림, 세속주의자, 전통주의자, 근대주의자, 무신론자, 기독교인, 좌파, 보수파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던 것이다. 이 회동의 결과로 발표되는 아반트 성명서는 공동 합의된 사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재단의 주요 자금은 주로 지식인층을 위한 책 등 출판물 판매에서 나온다. 일반 출판사들이 보통 2,000부 정도의 책을 팔고 있지만, 이 재단은 특히 귤렌이 쓴 책을 중심으로 5만부 이상 팔기도 했다. 출판물에서 재단은 년간 삼십만불에서 오십만불 사이를 벌어들이며, 또한 음악 CD 판매로 소액이지만 수익에 보탬이 되었다. 아반트 회동 같은 특별 행사나 특정 주제에 대한 회의 개최 시에는 재단은 지역의 사업가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재단은 세 번에 걸쳐 외국 학자 초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전체 오만불 미만의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이와 함께, 재단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혁신적 방식을 도입하여 왔으며, 최근의 예로는 유명 가수의 CD 제작으로, 이 가수들은 수익금을 터키와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 있는 개인교습 센터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재단은 귤렌 운동에 직접적으로는 참여하고 있지 않은 10명의 유명 가수와 접촉하여, 그들의 특별 음반을 내, 헌정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모음 음반은 짧은 시간 안에 20만장의 판매를 올리게 된다. 이 수입금은 재단 운영에 사용되고 있다.
재단의 다른 자금모금 활동으로는 터키 국가대표 선수와 다른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간의 축구경기를 마련하였다. 행사 모금액은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학생을 위한 학교 건립에 사용되었다. 계속되던 세르비아/보스니아 분쟁도 이 학교의 정문에서는 그쳤는데, 이 두 인종 집단의 어린이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 작가 재단은 법정재단으로, 사업 목적으로 운영하는 자산에 대해 재산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사무실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어 이런 세 감면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오랫동안 재단은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최근에 출판된 귤렌의 책이 매우 잘 팔리고 있어 조만간 사무실이나 토지를 구매할 예정이다.
파티 대학교
파티 대학교 (Fatih University)는 의회가 이스탄불 외곽에 사립대학 설립을 승인한 후 일년만인 1994년에 개교했다. 터키에서 사립대학 설립은 영리를 위한 개인이나 사업체는 자격이 없으며 자선재단만 자격이 있다. 최초로 파티에 자금을 댄 “창립 재단”은 앙카라에 있었으며, 귤렌 운동의 지지자로 구성되었다. 자금은 두 도시의 귤렌 지지자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들은 대학 건립과 지원에 돈을 약속한 앙카라의 사업가들과 이스탄불의 사업가들이었다. 이스탄불의 한 부유한 사업가는 학교 건립을 위해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부지를 기부한 바, 재산 가치는 그 당시 5백만불로 평가되었지만 현재 약 1억불을 호가하고 있다. 일단 부지가 확보되자, 다른 사업가들은 건물 건축과 학교 개교를 위해 기부했다.
현재 건물 유지, 교수 급여 등 운영비 측면에서 수업료로 학교 운영은 충분하다. 하지만 터키 법상 대학 건물은 수업료로 건축될 수 없으며, 재단이 그런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따라서 대학의 모든 건물과 연구실은 재단이 모금한 헌금으로 세워졌다. 몇년 전 재단은 약 7백만불을 들여 연구실을 세웠으며, 2007년에는 약 4백만불의 돈으로 준비과정 교육 건물 건설을 마쳤다. 2008년 대학은 연구실 건립을 위해 천5백만불의 자금이 필요하지만, 재단은 그런 큰 금액을 일년 내에 마련할 수 없어 금년과 내년에 각각 절반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 귤렌 지지자인 많은 사람이 재단에 기부하고 있으며, 소수의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큰 돈을 기부하여, 대학 당국은 그런 기부자 이름으로 건물이나 연구실을 명명하기도 한다. 한편, 대학과 재단은 급진적 정치 집단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도록 헌금 접수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최근 대학은 몇 개의 신 과학 건물이 급히 필요해서 한 이슬람 은행에 개발 보조금을 신청할 기회가 있었다. 이 은행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소재하면서 교육 진흥을 위해 무슬림 국가에 있는 대학교에 무이자로 돈을 대출해 주었던 것으로, 대출금은 터키 정부로부터 받는 형식을 취했다. 대학 당국은 이런 안을 귤렌에 자문했고, 그는 추진하지 말도록 충고했다. 은행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소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사람들은 귤렌 운동이 사우디 돈을 받는다고 비난할 것이어서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귤렌이 말렸던 것이다. 그는 조금 더 참고 기다려 터키의 귤렌 공동체로부터 돈을 받자고 대학 당국을 설득했다. 터키의 고등교육 관련 법에서, 대학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정부는 매년 대학 예산의 15%를 지원한다. 이는 정부가 매년 심사를 하여 자격이 있는 대학에 할당하는 제도로, 파티는 2006년과 2007년에는 자격이 되어 지원금을 받았지만, 2008년에는 한 개의 기준이 미달하여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재단과 대학의 관계는 재정 부문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사실 대학 당국은 누가 재단 이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인터뷰한 부총장은 이런 사실을 증명해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최근 그는 이스탄불의 모임에 참가하여 대학 발전을 위해 부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때 그가 모르는 한 신사가 “내가 처음에 기부한 토지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하여 그 때야 부총장은 원래의 기부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학 관리자는 누가 창립 이사진인지, 누가 재단의 기부자인지 알 지 못한다. 돈은 여러 사업을 펼치는 대학을 지원하는 재단에 주어 지는 것으로, 재단에 기부하면 기부자는 보통 어떤 사업에 그들의 기부금이 사용될 것인지 잘 알지 못하며,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기부만 한다.
대학 당국의 요청으로 구체적 사업의 자금을 마련하는 일 이외에는 재단은 대학에 관여하지 않는다. 재단 사람은 누구도 대학평의원회에 속해 있지 않으며, 학사 행정에 관여하는 일도 없다.
이런 점은 대부분의 개인 기부자도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한 큰 보석상이 캠퍼스 건물 건립에 기부하고 건물 개막식에는 참여했지만 그 후로 대학 관리자들이 그를 보지 못하였다 한다.
파티 대학생의 몇 프로가 귤렌 운동 참가자인지 물어보자, 부총장은 50% 정도가 동조자일 것으로 추정하여, 학생들은 운동 참여 정도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파티 대학교는 귤렌과 관련된 것으로 잘 알려져 이 대학 선택은 학생들이 최소한 귤렌 운동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 대학에는 종교학과가 없으며, 또한 귤렌이나 그의 이념에 대한 강좌, 그의 사진이나 동상, 또는 그의 가르침에 중점을 두는 조직된 서클이나 토론회 등 어떤 것도 있지 않다. 귤렌의 저작물 토의를 위해 만나는 학생들의 어떤 지역 서클도 전적으로 자유의사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귤렌 정신에 의한 대학 임무 수행을 위해, 대학 관리자 채용시 귤렌의 교육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교수진의 50% 미만이 운동의 참가자이다. 이 대학은 귤렌이 주창하는 가치를 공유하는 교수들을 채용코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가치에는 포괄성, 대화, 교육과 과학에 대한 존경, 서로 존중하고 국가를 존중하는 훌륭한 시민이 되도록 학생교육을 인간적 방식으로 시행하는 것 등이 포함되고 있다.
많은 다른 대학과는 달리, 파티 대학교에서는 캠퍼스 내에서 음주를 금지하는 터키 법이 철저히 지켜진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여식을 이 대학에 보내는 것을 선호하며, 터키의 어떤 대학보다 여기에서는 여성이 더 안전하고 엄격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기대가 따르는 것이다. 이 결과 파티 대학교는 다른 대학교와 비교해 여학생 비율이 더 크다.
귤렌 병원
현재 터키에는 6개의 귤렌 병원이 있으며, 우리는 그 중 두 개 병원인 이스탄불 세마 (Sema) 병원과 부르사 바하르 (Bahar) 병원을 방문했다. 세마 병원의 초기 창립자금은 보건 부문에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려 했던 귤렌 공동체의 다섯 명의 사업가에 의해 조달되었다. 이들은 귤렌 학교의 매우 성공적인 모델을 개인 병원 설립에 적용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귤렌과 상의했고, 귤렌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계획을 추진토록 권했다. 이 다섯 명의 사업가는 세마 병원의 초기 자금을 그들이 거래하는 이스탄불의 은행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조달했다. 이들은 현재 병원의 이사진으로 있으면서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터키에 일반 의료보험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사립병원에서 발생하는 비용 전체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병원은 심장병이나, 집중 치료나 안질환 치료 등에 의료보험 이상으로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 다른 질환의 경우에 어떤 사람은 돈을 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의 치료비를 흔히 귤렌 후원자들이 대고 있는 것으로, 때에 따라 후원자가 환자를 동반하여 병원에 자기가 의료보험을 초과하는 비용을 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른 경우에는 후원자가 어려운 환자를 돕도록 돈을 익명으로 보내며, 병원 직원은 이들이 누구 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어떤 환자는 병원 창구에 찾아와 의료보험상의 금액 이상은 낼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병원 직원은 이 환자를 도와줄 수 있는 후원자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병원의 의료 서비스 관리자로 일하는 크리스틴 (Kri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를 후원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는 정말 대단하다. 그들의 후원 시스템은 비공식적이지만 효율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귤렌 운동을 통해 우리는 신생 병원이며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이다. 후원자들은 우리 병원이 목표 달성에 늦는 일이 없도록 충분하게 지원하고 있다.
세마 병원의 전략 계획에 재무 목표는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직원과 환자 만족이 강조된다. 사립병원이기 때문에 이 병원도 영리를 추구하지만 그 수익금은 당초 발기한 사업가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수익금은 병원의 개선과 발전, 또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른 병원이 시작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틴과 의사들과의 인터뷰중, 세마 병원으로 성공 모델이 만들어지면, 다른 병원이 귤렌 지지자들에 의해 건립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더 인간적으로 보살펴주는 분위기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언급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 병원은 다른 병원과 다음과 같은 세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l) 의사와 직원의 채용과 급여 (2) 치료비 책정 방식 (3) 환자 치료 방식
많은 공공병원에서 의사는 공무원으로 매우 바쁘며, 한 의사가 말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공병원에서 의사는 환자를 귀찮은 존재로 대한다.” 그는 “이 병원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 일한다”고 덧붙였다. 세마 병원의 채용 방식은 엄격하다. 의사나 관리 직원 모두가 자격증과 경험이 필수적인 한편, 채용시 “과거 실적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이 더 중시된다. 사람 돕는 것을 좋아하는 간호원이, 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간호원보다 환자에게는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병원의 80명 의사중 많은 사람이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 귤렌의 지역 서클에 속했고, 운동에 관여되지 않는 다른 의사도 귤렌 학교 모델에 바탕을 둔 인간위주의 조직에서 일하고 싶어하고 있다고 한 의사가 말했다. 흔히 의사들은 세마 병원에 일하면서 급여 면에서 손해를 보고 있지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에서 환자 치료에 최우선을 두는 병원에 일하려는 욕구와 자부심이 그런 재정적 우려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직원도 세마가 귤렌 병원인 것을 알고 있어, 병원의 문화나 분위기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애당초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2만여 명의 의사중 약 2천명이 귤렌 운동에 참가하며 의사 지역 서클에 속해 있다. 2008년 4월, 그들중 60명의 의사가 자신들의 돈을 들여 터키 동남부 지역을 방문하여 3일 동안 무료로 환자를 치료했다. 이들 환자중 심장병을 가지고 있었던 130명이 세마 병원으로 후송되어 무료로 진료를 받았다. 이와 함께 귤렌 운동에 헌신적인 의사 서클은 모두 운동에 기부하며 또한 병원의 많은 직원들도 기부하고 있다. 실제로 세마 병원의 직원은 알바니아의 귤렌 학교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 병원은 또한 세계 모든 지역의 귤렌 학교 교사에게 병원 직원과 같이 일반 치료비의 80%을 할인해주는 혜택을 주고 있다. 대부분 최저 급여로 일하며 의료보험 이상 지불할 수 없는 이들 교사를 경제적으로 도와 주는 것 이외에, 크리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봉사를 예우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뷰 전날 나이지리아의 귤렌 학교 교사 한 명이 여러 가지 병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왔다. 세마 병원이 이 환자에 제공하는 치료에 대한 감사 표시로 나이지리아의 장관은 그 나라에 귤렌 병원 부지를 약속하기도 했다. 종전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위해 터키 동남부 지역을 방문했던 일단의 의사들중 어떤 이는 현재 이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귤렌 학교 모델을 바탕으로 병원 개설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아프리카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귤렌 정신과 목적이 이런 다양한 조직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 의사와 간호원을 터키 교육기관에서 교육하고 귤렌 병원에 채용하는 것이라고 한 의사는 의견을 피력했다.
환자가 세마 병원의 독특한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크리스틴은 심장 수술을 받은 한 육체 노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내가 여기에서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세마가 환자를 돌보는 점에서 다른 병원과는 다른 실례는 이 외에도 많이 있다고 크리스틴은 말했다. 국내와 해외로부터 세마 병원으로 환자들이 찾는 이유의 하나는 세마가 귤렌의 생각들의 영향을 받은 귤렌 병원이라는 점이다. 다른 경우에는 사람들이 이 병원은 환자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최신 설비로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것이다.
부르사 바하르 병원
바하르 병원은 1998년 일단의 사업가들이 4-5명의 의사를 고용하여 소규모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의료 센터로 시작하였다. 이런 사업가 외에도 의료 센터의 개설을 추구했던 많은 귤렌 운동 참가자들의 대중적인 지원이 있었다. 첫 응급차는 여성 지지자들이 기부한 보석을 판 대금으로 구매하였다. 2004년, 건물의 일층이 병원으로 개원되었으며, 곧 병원 확충을 위해 이 8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었던 귤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현재 병원은 전층을 사용하며 80개의 병상을 가지고 있고, 53명의 의사와 4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 병원은 병동 전체가 최신식 의료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최신식 심장 혈관 병동에서는 지금까지 700회 이상의 심장병 수술이 시행되었다. 도시의 8개 개인병원중, 바하르 병원은 세 번째로 크며, 매월 약 천회의 수술을 시행하고 연간 예산은 약 4천만불, 이익율은 10-15% 수준이다.
이 병원의 모토는 “의료에 대한 신뢰”로, 터키에서 흔히 환자는,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리 목적으로 진료나 약을 처방한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병원의 주요 특징은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한 환자가 눈에 대한 진단을 받기 위해 이스탄불의 안과 의사를 찾아갔지만 그 진단을 믿을 수 없어, 바하르 병원에서는 의사를 믿을 수 있다는 친구의 충고에 따라 이 병원을 찾아왔던 것이다.
병원 당국은 직원들이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며 병원에서 “집에서처럼” 편하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의사를 포함 직원의 채용은 전문적 능력과 환자 치료 자세 두 가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전체 직원의 약 40%는 귤렌 운동 참가자 및 지지자이며, 나머지 60%는 운동에 참가하고 있지 않지만 환자 진료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는 병원 정책에 공감하고 있다.
병원은 치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를 도와주고 있다. 최근 두 번에 걸쳐 병원의 의사들은 터키 동남부 지역을 방문,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찾아 치료를 위해 이 병원으로 데려와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병원의 방침에 따라, ‘국경을 넘어서는 의사’ 조직과 비슷하게 선행을 베풀려는 의사들이 만나는 조직이 구성되어, 35명의 의사를 터키 동남부 도시에, 그리고 40명의 다른 의사를 다른 도시로 파견한바 있다.
바하르 병원 의사들의 급여 수준은 사립병원 의사 급여의 평균에 해당한다. 의사가 급여에 신경 쓰지 않고 환자 치료에 전념하도록 의사의 급여는 적절해야 한다고 병원은 믿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의사 지역 서클에 속해 있어 이런 서클을 통해 의료 서비스 사업, 학교와 학생 장학금 지원 등 다양한 사업에 재정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인터뷰한 어떤 의사는 연소득이 십이만불로 자식을 3명 키우고 있으며, 매년 연소득의 30%인 4만불 정도를 귤렌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 그는 연봉의 50% 기부를 약속하는 의사도 있다고 말하면서, 부르사 의사들의 기부금으로 연간 약 600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는 학 학생당 장학금을 $1,500로 보면 연간 $900,000 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와 함께 의사들은 특정 학교 건물이나 수시로 발생하는 다른 사업도 지원한다고 말했다. 왜 기부하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기부 행위는 하나님에 감사의 표시로, 내가 청년 시절에 학생들과 같은 기숙사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사업가들이 큰 금액을 희사하는 것을 보았으며, 나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기부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은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보상해준다.
의대 재학시절, 이 의사는 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그가 내는 돈이 기숙사 운영에 충분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가족이 학생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을 보고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그 후 사업가들이 이런 경비를 대는 것을 알게 되어, 자기도 언젠가는 주는 입장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교육기관: 기숙사와 대학 준비과정 교육
귤렌 가르침의 중심에는 모든 터키의 젊은이를 위한 양질의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는 교육을 개발도상국의 삼대 문제인 무지, 빈곤, 내부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해법으로 보고 있으며[2], 지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중 무지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이의 해결을 위해 교육이 터키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라고 본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 자신의 문제로, 사회, 정치 체계가 마비된 사회이던 시계처럼 정확하게 운영되는 사회이던 교육이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귤렌은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교육의 장려를 통해 국가와 인류에 이바지하라고 독려한다.
설교에서 끊임없이 교육을 장려하며, 귤렌은 사업가, 힘있는 자본가들이 양질의 교육을 위해 재정적으로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우수한 교사 양성이 학교 교육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요소이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 따라 귤렌은 첫 단계로 학생들이 머물면서 열성적인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숙사를 지원토록 사업가들을 고취했다. 이런 것은 지방의 청소년이 대도시의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수업료와 책값 이외의 방세 등을 치를 여력이 없는 경우에 특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주거공간 제공과 함께, 기숙사 생활 학생에게 공부를 도와주는 개인교사가 마련되었다.
1970년대에 귤렌 자신도 이런 기숙사와 자기의 아파트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부르사에 사는 70대의 신사인 야부즈는 남동생과 아파트에 살면서 위층을 귤렌에 임대해 주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이 때 귤렌은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을 계속 불러들이고 있었으며, 다른 학생들에게는 성적이 좋지 못한 학우를 가르치도록 독려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본 저자가 터키에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2008년 4월 현재, 귤렌 기숙사는 여러 도시에 많이 운영되면서 세계적으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들 기숙사는 운동과 관련되는 지역의 사업가, 전문직 종사자, 노동자들이 후원하고 있으며, 기숙사 생활에 최소 비용이 청구되지만, 많은 학생이 경비를 낼 수 없어 보조가 필요하다. 기숙사는 대부분 자립적으로 운영될 수 없어 지역의 사업가에 의존한다. 4장 “지역 서클의 네트워크”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많은 지역 서클이 귤렌 기숙사를 후원하고 있다. 인터뷰한 지역 서클의 참가자는 대부분 귤렌 운동을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기숙사 설립 다음으로 귤렌이 고취한 둘째 사업은 대학 준비과정 학원의 설립이다, 이는 고등학생이 대학입학 시험에 준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매년 2백만여에 달하는 응시자들 중에서 25% 정도가 준비과정 없이 대입에 성공하며 50%정도는 국가 혹은 사립기관이 지원하는 대입 준비과정을 통해 시험에 합격한다. 귤렌의 교육 철학을 공유하는 교육자가 제공하는 준비과정 교육은 현재 터키 대부분의 도시에서 운영 및 지원되고 있으며, 이런 준비과정 교육을 듣는 학생들의 75-80%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다. 이 과정의 성공요인의 하나는 대부분 귤렌 운동의 참가자로 경제적 이득을 넘어서, 가르치는 교사들의 자질과 헌신이라 하겠다.
귤렌 준비과정 교육이 현재 수업료를 받는 사업체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수업을 받고 싶지만 수업료를 낼 수 없는 학생이 생긴다. 우리가 방문한 모든 지역 서클에서 어려운 학생이 준비과정 교육을 다닐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고 있었으며, 그런 지원을 통해 대입 시험에 적절히 준비할 수 없는 학생에게 기회가 제공된다. 또한 지역 서클의 많은 참가자가 준비과정 교육을 다니면서 처음 귤렌 운동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숙사와 준비과정 교육은 모두 터키의 젊은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의도적이진 않지만 운동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교육기관: 귤렌 학교
귤렌 운동의 핵심은 귤렌 학교로 (천 개 이상으로 추정), 전세계의 5대륙 거의 100개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귤렌의 교육 철학이 가장 명쾌하게 표시되며 또한 그의 교육 이념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학교들이다. 학교의 목표는 성실한 신자, 충성스런 시민이면서 과학 부문에서 경쟁력을 가진 세대의 양성으로, 특히 무슬림 신앙, 터키-이슬람 생활방식과 서구의 과학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있다.[3]
이런 학교는 페툴라 귤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귤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만든 개인 기업과 재단이 소유하고 있지만 보통 “귤렌 학교”라고 불린다. 귤렌 자신은 학교와 거의 접촉이 없으며, 정확한 숫자나 이름을 알지 못한다.[4] 그의 청년 시절 교육자로서의 모범, 그의 교육, 세계 공동체, 인간의 진보에 대한 사상에 감화되어 한 세대의 사람들이 페툴라 귤렌의 이상을 바탕으로 터키, 중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학교를 세웠던 것으로 이를 근거로 귤렌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귤렌 기관 (미디어 조직, 병원, 기숙사, 준비과정 교육 등)과 마찬가지로 학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중앙 조직이나 공식적 구조는 없다. 오히려 각 학교는 귤렌 운동에 참가하는 일단의 사업가와 다른 참가자들이 처음 시작했던 것으로, 이들은 지역에서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자금을 조달해서 실행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들 학교의 건설, 수리, 보수에 터키 정부 지원은 없었다는 말을 수 차례 들었다. 최초의 재정지원은 지역의 후원자들이 하며, 학교가 학생의 수업료 수입 등으로 자립할 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귤렌 학교는 수업료를 받는 사립학교로 입학에 엄격한 학업수준이 요구되며, 이런 방식을 통해 귤렌 학교는 학생들이 대학 입학과 국내외 경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엘리트 학교로 평가 받고 있다. 귤렌 학교는 주재 국가의 교육과정을 따르면서 대부분의 과목을 영어와 함께 일부 터키어로 가르친다. 수업료를 내는 부모나 학교 지원하는 사업주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각 학교에서 전체 학생중 약 20-40%는 장학금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학생의 부모는 그들이 내는 수업료가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돕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일부 부모와 사업체 후원자는 어려운 학생에게 추가로 장학금을 후원하기도 한다.
터키의 국정 교육과정은 전적으로 세속적이어서, 모든 학교에서 종교 교육은 일주일에 한 시간만 시행한다. 귤렌 학교도 이런 원칙을 따르며, 한 시간의 필수 종교 교육에서 학생이 이슬람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귤렌 학교가 다른 사립, 국립 학교와 차별화되는 점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귤렌 학교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귤렌에게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가치에 관한 것이며, 귤렌 학교는 학생에게 이슬람을 가르치고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5] 둘째 학교의 교사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으로 특별히 선택되어 교육을 받는다. 단순히 학교에서 이슬람을 설교한다기 보다, 교사 자신이 선행과 도덕적 행동으로 학생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더욱이 학생의 교육적, 도덕적 발전을 위한 교사의 열정은 일반 학교 수업시간을 넘어서, 교사가 방과후에도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교사는 학생의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가끔 가정방문을 통해 학생의 학업 진도나 문제를 가족과 상의한다.
교사 채용시 교사의 도덕관과, 자신의 학업적 전문 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지가 주 고려 사항이다. 한편으로는 교사들 대부분이 귤렌 학교나 대입과정 학원에서 수학하여 학업적으로 우수할 뿐 아니라 귤렌의 교육 이상에 대해서 박식하며 이에 열정적이다.
귤렌은 대학생이 교육을 직업으로 선택하도록 계속해서 독려하면서, 교육 이외의 직장에서 미래에 돈을 더 벌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만 교직을 의료, 기술, 법 부문에 종사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놓았던 것이다.[6] 교육을 통해 젊은이에 봉사하는 것은 모든 책임있는 인간의 의무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동기부여를 통해 귤렌은 교사의 지위를 비교적 저임금의 알아주지 않는 직업에서 “국가 미래를 건설하는 주요” 직종으로 격상시켰다.[7] 그가 교사를 중시한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교육을 전공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귤렌에게 영감을 받은 이들은 교육을 직업으로 택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귤렌 학교의 특징이자 그 성공의 주요 요인은 바로 이런 헌신적 교사들이다. 한편, 교사들이 더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기꺼이 포기하고 교육에 종사한 다는 사실은 지역의 사업가들이 학교의 재정지원을 통해 그들의 책무를 다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 지역의 사업가들이 학교 건설에 돈을 기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특히 건설업이나 가구 부문에 종사하는 지지자로부터 현물 기부가 이뤄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르사에서 최초의 귤렌 학교는 1980년대 초반에 세워진 고등학교이다. 우리가 인터뷰한 지역의 사업가 그룹은 기존의 국립학교가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어 새로운 학교가 급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 20명은 당시에 그들 사업을 막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의 독자적인 건설과 지원은 그들에게 매우 벅찬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사람은 건설에 필요한 철강을 사오고, 다른 사람은 시멘트를 공급했다. 그 후, 그들은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을 찾아내어 학교 건설사업에 필요한 자재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같은 방식으로 학교는 일반 건설비용의 1/3이나 절반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 우리가 부르사에서 이들과 만난 학교의 재산 가치는 약 천4백만불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부르사 외곽의 새 학교 건설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 중 한 사람이 학교 부지를 기부했고, 다른 사람은 건설중인 세 개 건물의 한 개에 자금을 대고 있고, 참석하지 않은 다른 사업가는 둘째 건물의 건설에 돈을 대고 있었다.
최초의 기숙사, 대입 준비과정, 학교 설립 당시, 자금을 모으고 여러 사업에 분배하기 위해 민간 재단이 설립되었다. 일반적으로 기부자는 기부 후 사업 내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그들이 도와주는 학생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기부금이 재단에 일괄적으로 주어져 필요한 사업으로 분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재단설립 형태는 포기되고, 다양한 귤렌 사업을 지원하는 모금 활동을 관리하는 사업체 설립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이런 전환의 이유는, 재단이 사업체보다 더욱 엄격하게 규제된다는 사실과 터키의 지난 군사 쿠데타 결과 새로운 정부기관이 재단을 해체하고 재원을 회수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정치 불안기에는 사업체가 재단보다 탈취되지 않고 더 안전했던 것으로, 사업체는 재단과는 달리 정부로부터 세 감면 혜택은 없지만 운동의 사업체 지도자들은 안전 요소가 이런 세제 혜택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사업체는 이익을 창출할 수 있고, 이런 이익금은 일상적으로 학교 지원에 사용되고 있다. 사실 귤렌 학교를 운영하는 사업체는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어서, 운동과는 관련없는 기업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귤렌 학교 모델을 사용 사립학교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학교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귤렌 학교의 성공은 수업료가 아니라 헌신적인 교육자들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세리에서 인터뷰한 사람과 같이, 부유한 사업가 한 명이 기숙사나 학교 건립을 위해 혼자 큰 돈을 기부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건립사업은 많은 지지자의 기부에 의한 공동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부르사에서 약 천명이 지역 서클 모임에 다니면서 지역 사업에 꾸준히 참가하며, 다른 천명이 특정 사업을 돕고 있다고 추정했다. 운동의 주요 참가자가 되는 이 첫 집단의 연간 평균 기부금은 15~20% 수준이다.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해 온 이들에게 연소득의 각 1/3을 각각 사업, 가족 부양과 귤렌 사업에 할당하는 것이 기본 틀이 된다. 현재 부르사의 많은 부유한 사업가들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기부금은 상당한 액수에 이른다. 예컨대, 포커스 그룹의 사업가중 한 사람은 큰 직물 제조업체의 소유주 겸 사장이며, 다른 사람은 세계적인 건설회사를 가지고 있다.
터키와 세계의 귤렌 학교 숫자 추산은 크게 차이가 난다. 바시칸 (Baskan)은 세계 5대륙 52개국에 2천 개 학교가 있다고 추산하며[8], 한편 발즈 (Balci)는 카자흐스탄에 29개, 아제르바이잔에 12개, 투르크메니스탄에 13개, 카자흐스탄에 12개 학교가 있다고 주장한다.
터키계 중앙아시아 국가중 유일하게 귤렌 운동에 적대적인 국가는 우즈베키스탄이며[9],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리비아를 제외하고 모든 무슬림 국가에 귤렌 학교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6개 학교는 탈레반에 의해 폐쇄되었지만, 다시 열렸다. 북부 이라크의 4개 학교에는 대부분 쿠르드와 지역 무슬림 학생이 다니고 있다.
터키와 해외의 귤렌 학교 숫자의 정확한 산출은 몇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 첫째는 학교를 관리하는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으로, 각 학교는 지역별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터키 내에서도 학교를 추적하는 통제 기관이나 조정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는 귤렌 학교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들이 조직되고, 현지 학교제도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귤렌 학교는 때에 따라 외국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특히 초기단계에 지방정부가 자국에서의 학교 설립을 장려하기 위해 부지와 건물을 기부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명의 사업가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건물이 아주 낡아 보수에 상당한 경비가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
예컨대,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학교 용도로 건물을 기부했는데, 터키 사람들이 오십만불 정도의 비용을 들여 보수했다. 3년후 학교는 자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구 소련의 터키계 국가에서 첫 학교가 개교할 당시, 귤렌은 당시 오잘 대통령에게 해당 국가 정부에 학교 개설을 허락해달라는 서한을 보내도록 부탁했다. 오잘 대통령은 청을 받아들여 귤렌 학교가 터키를 넘어 해외로 뻗어나가도록 지원했다.
과거 20년 동안 귤렌에 고취된 많은 사업가들은 사업을 세계적으로 특히 구소련과 발칸 국가로 확장시켰다. 이 국가들과 사업상 관계를 많이 가지면서, 이들은 젊은이를 위한 교육 기회를 개선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흔히 이들 사업가가 귤렌 학교 건립 계획을 최초로 내어 놓으며, 재정 후원으로 자신의 재원을 약속하며, 또한 터키의 친지와 사업 단체에 재정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10] 인터뷰 과정에서, 알바니아, 보스니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이 국가들에서 귤렌 학교의 건설과 개교에 자신의 자금을 댄 다섯 명의 사업가를 우리는 찾아낼 수 있었다.
귤렌 학교는 구 사회주의 국가, 특히 구소련 국가에 제일 많다. 종전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발칸과 중앙아시아 국가는 최초의 해외 귤렌 학교가 설립된 곳이다. 귤렌 학교는 서 유럽, 특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터키 공동체에도 있으며, 최근에는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개교했다. 해외의 귤렌 학교에서는 더욱 광범위한 문화적,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어, 예컨대 유럽과 미국의 귤렌 학교는 자녀를 “터키 방식”으로 키우고자 하는 터키 이민 가족을 끌어 들인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는 교육의 질, 기술, 높은 교육 수준으로 학생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학교가 집중되어 있어 터키 해외 이주민과 주민 등 다양한 터키인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사업가, 학교, 지역 정치인 사이를 연결하는 문화와 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11]
청년을 테러 집단으로 적극 이용하는 지역에서 귤렌 학교 역할의 하나는 이들 청년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PKK (쿠르드노동자당)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터키 동남부 지역에 대한 최근의 연구조사에서 이 지역의 귤렌 학교가 PKK 가입을 권유 받는 청년들에게 대안 역할을 한다고 밝힌바 있다.[12]
킴세욕무
귤렌 사업의 시작과 운영에서 분권적 유형에 유일한 예외가 되는 조직이 킴세욕무 (Kimse Yok Mu)로, 1999년 터키 마르마라 지역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지진 이후에 생긴 비영리 구호 단체이다. 이 귤렌 기관은 공식적, 계층적 구조와 함께 조직적 모금 방식을 가지고 있다.
마르마라 주민들의 어려움과 구호 자금 각출을 호소한 프로그램을 사만욜루 TV가 3년 동안 방송한 후, 2002년에 킴세욕무 연대, 구조 협회가 재단으로 창립되었다. 몇 년 내에 이 단체는 터키뿐 아니라 세계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영역을 넓혀갔다.
이 단체는 현금과 현물 기부를 모두 받으며, 2005년 파키스탄 지진에는 천이백만불을 원조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2004년 쓰나미 재해, 2006년 페루 지진에 기부금을 보냈으며, 부족간 전쟁 후의 빈곤 해결을 위해 에티오피아와 케냐에도 2006년 기부금을 전달했다. 현재 이 단체는 수단 다르푸르에 새로운 도시를 3년에 걸쳐 5천만불의 예산으로 재건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킴세욕무는 연간 천6백만불 정도를 모금하며, 이 모금에는 아주 새로운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2007년 대리점 은행 구좌로 직접 송금된 헌금은 6.6백만불에 달했고, 이 중 $558,000은 신용카드 온라인 구좌로 헌금되었다. 한편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의 매점과 다른 작은 상점에
설치한 헌금함에서 나온 돈은 약 $165,000 이다. 가장 획기적인 방식은 3대 주요 휴대전화 회사로부터, 광고된 휴대전화 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기부금은 고객의 월간 전화비용에 청구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신 방식으로 2007년에는 백만불 가까이 모금할 수 있게 된다. 이 단체의 모금함은 이스탄불뿐 아니라 다른 도시의 여러 장소에 설치되어 있다.[13]
이 단체는 민간 기관이지만 2006년 정부로부터 “공익 협회”라는 자격을 획득했다. 현재 본부는 이스탄불의 5층 건물에 있으며 집행 위원회의 사장 겸 회장이 관리하고, 현금 및 현물 기부를 수령하여 분배해 주고 있다.
이 구호 기관의 사업에는 자매가족 사업, 현물 지원, 교육 지원 및 외국 지원 사업이 있다. 자매가족 사업에서 이 기관은 중산층이나 부유한 가족을 가난한 가족과 연결시켜, 잘 사는 가족이 못사는 가족을 생필품, 교육, 취업 기회 제공 등으로 도와주도록 하고 있다. 현재 이 단체는 터키 전역에서 약 1,500 가족을 연결시켰으며 향후 5년 동안에 십만 이상의 가족을 연결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14]
푸드 뱅크를 통해 킴세욕무는 음식, 옷, 위생기구, 연료 등을 개인들과 생산업체로부터 얻어 필요한 사람에 나눠준다. 2007년, 이 기관은 이런 물자를 세계 11개국에 있는 2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며, 이외에도 희생제 기간에는 가축의 고기를 수집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2007년에는 12,500 마리의 고기를 세계 35개국의 4만 5천명의 사람과 3만명의 터키인에게 나눠줬다.[15]
킴세욕무는 또한 터키와 외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교육 서비스와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얻어 2만 여명의 학생에게 개인 교육을 실시하고, 또한 파키스탄에 11개, 인도네시아에 4개, 방글라데시와 터키에 각각 1개의 학교를 건설했으며 완공후 학교를 지방정부에 이양했다.[16]
이 기관은 또한 시골 지역 주민에게 무료 건강진단과 약품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킴세욕무는 지역의 지지자 그룹을 구성해서 PKK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키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지역 의사들이 그곳의 도시와 마을에 있는 8천명의 환자를 검진하는 한편, 일단의 노동자들은 이스탄불, 부르사 및 다른 도시에서 기부 받은 음식과 옷을 나눠주었다. 이런 서비스로 터키 뿐아니라 일부 아프리카 국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오만 여명이 혜택을 받았다.[17]
[1] 이슬람 금융관계 토의는 Yousef (2000) 참조
[2] Unal, Williams (2003)
[3] Turam (2004).
[4] Carroll (2007).
[5] Solberg (2005)
[6] Aslandogan and Cetin (2006)
[7] 같은 책에서
[8] Baskan (2004)
[9] Balci (2003)
[10] Balci (2003)
[11] Turam (2004)
[12] Kalyoncu (2008)
[13] Koc (2008)
[14] Bolukbas (2008)
[15] Sakin and Albayrak (2007)
[16] Bolukbas (2008)
[17] 같은 책에서; Koc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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