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과 음악

페툴라 귤렌

– 종교 이외의 서적도 읽어 보는가?

– 시간이 허용되는 대로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주제가 종교 이든 다른 것이든 하루에 200 페이지 이상 읽도록 노력하고 있다. [엘투그룰 오즈콕, 일간지 후리옛, 1995년 1월 23-30일]

독서에 대한 사랑

– 독서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 어린 시절, 사도님의 동료들의 영웅적 행동에 관한 책을 집에서 읽었었다. 이슬람 초창기부터 전설로 생각되는 아부 무슬림 알 쿠라사니 같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 후 18-20 살 정도 되어서는 법학과 철학 책을 더 많이 읽기 시작했고, 다윈설과, 또한 관련 주제에 대해서도 읽었다. 하나의 책을 통해 다른 책을 알게 되고 하여, 이런 식으로 계속 독서해 나갔다. 군 복무 시에는 아주 현명한 지휘관을 만났다. 그는 수피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며, 동양의 이슬람 및 서양 고전작품 모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서양 고전작품을 많이 읽도록 권장하여, 나는 루소,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톨스토이, 실존주의 철학자 및 다른 서구 작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에유프 잔, 일간지 자만, 1995년 8월]

귤렌에 영향을 준 서구 작가

- 선생에 영향을 준 서구 작가에는 누가 있나?

– 우선 칸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러셀은 칸트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철학사를 뒤집어 놓았다고 혹평하였지만, 칸트는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터키의 신학대학의 신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졌던 인물로, 칸트와 관련 재미난 일화 한가지 이야기 해 보겠다.

내가 치른 설교자, 이슬람 법전 전문가 시험에서, 시험관이 나에게 질문했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성을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두 개의 범주로 구분했다. 그는 이론이성으로는 신을 알 수 없지만, 실천이성으로는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무슨 뜻이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시험을 함께 보았던 내 친구 한 명은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에게 농담으로 “이 칸트는 뭐야?”라고 물어 보았다. 나도 농담 삼아 말했다. “따뜻한 물에 설탕 조금 넣고, 잘 흔들어, 그 다음 레몬 즙 약간 만 떨어트려. 그게 바로 칸트야.”(터키에서 이런 음료가 실제로 있으며, 칸트라고 불린다)

데카르트는 그의 신학적 접근으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한편, 범신론자이지만 제임스 진스경을 매우 존경한다. 1960년 전에 그의 <미지의 우주>를 상세히 읽었고, 그의 우주는 무히딘 아라비의 우주와 약간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아주 좋아했다. 또한 그와 동시대의 천체 물리학자인 에딩턴도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 지금 언급한 사람들은 철학이나 물리학과 관련된 작가들이다. 문학방면의 작가에서는?

– 오랫동안 셰익스피어를 매우 존경하여 왔다. 그 이외 내가 존중하는 작가의 한 사람은 빅토르 위고로 공산주의에 이용당했지만, 그의 소설은 어릴 때부터 읽었다. 톨스토이도 아주 어릴 때에 읽었고 또한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도 좋아했다. [에유프 잔, 일간지 자만, 1995년 8월]

운문

– 선생은 시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좋아하는 작가와 시인은?

– 사상의 지평에 주는 무게로 내가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재능 있는 사람과 예술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어떤 잘 된 영화에 감명을 받듯이, 나는 피카소의 그림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으며, 문학 방면에서는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터키에서는 그 시와 산문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몇 명의 문인이 있다. 시 부문에서 야흐야 케말, 메메드 아키프, 내집 파즐을 존경한다. 시와 산문 모두를 통해 세자이 케라코즈도 중요하다. 탄지마트 개혁과 후속 세대에서는 나밀 케말, 쉬나시, 라자이자데, 레픽 하리드를 좋아했다. 테브픽 픽크레트는 읽기가 힘들지는 않았다.

서구 작가 중에서 발자크도 좋아한다. 현실주의자로 간주되지만, 그의 < 은방울꽃 >에서는 낭만주의가 잘 나타난다. 이란의 시와 프랑스 문학간에는 유사점이 있는 것 같으며, 내가 읽은 페르시아 문학에서 사디, 하피즈, 니자미, 안와리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네바르 세빈디, 일간지 예니 유즈을, 1997년 8월]

음악

– 음악도 듣는가?

–내가 16살 될 때까지 에르주룸에 살면서 수피 음악 연주자를 알고 지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수피 즉 우리의 고전음악은 수도승의 오두막과 쉼터에서 탄생했다. 그 찬가와 시는 나를 고전음악의 세계로 인도했으며, 예를 들어 이트르, 데데 에펜디를 좋아해서 들었다. 또한 하지 아리프 베이는 성인처럼 내가 존경했던 사람이다.

- 서양 고전음악에도 흥미가 있었는가?

– 사실은 나도 일부 서양 음악가를 존경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하여, “모차르트를 비평할 수 있나?”고 나에게 물어 보기도 한다. 내가 그에 대해 말을 할 수 있지만 비평이라 할 수는 없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양 고전음악의 협주곡과 교향곡은 정말 진지하고, 위엄 있고 풍부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비평까지 되지는 못하지만, 신이 그 재능을 부여한 모든 천재를 내가 매우 존경하듯이, 서양 음악가도 높이 평가한다. [엘투그룰 오즈콕, 일간지 후리옛, 1995년 1월 23-30일]

재산과 소유물

-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재산은 어떤가?

– 누비이불, 홑이불, 책이 있다. 오래 전에 유언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서 책은 재단으로 물려주도록 되어있다. 없어지지 않는 한, 그 재산은 재단에 귀속될 것이다. 식사는 편한 대로 하며, 친구가 준비해 오거나 내가 직접 만들기도 한다. 당뇨병과 고혈압 증세가 있어, 매일 1,200-1,800 칼로리의 저 칼로리 음식을 섭취하며, 치즈와 올리브를 먹기도 한다. [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바흐, 1995년 1월 23-30일]

일과

- 선생처럼 예민하고 수줍은 사람의 일과는 누가 챙겨주나?

– 평생 홀로 지내어서 자족하는 생활이 몸에 배었다. 40년 동안 옷 빨래는 직접 손으로 했고, 음식은 내가 만들어 먹는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병환으로, 어머니 음식 준비를 내가 도와주고는 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 저기에서 혼자 살아, 에디르네 체재 기간 동안에도 혼자 있었고, 이즈미르에서는 조그만 집에서 혼자 지냈다. 5-6년 후에 새 집에 세 들어 살 때도 혼자였다. 손님이 오면 내가 음식과 차를 준비했고, 이런 생활은 9/12 쿠데타 때까지 계속되었다[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바흐, 1995년 1월 23-30일]

음식 준비

- 음식은 직접 만드나?

– 밀가루와 감자로 10개의 다른 종류의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어떤 것은 내가 직접 개발한 조리법이다. 감자 탕은 현재 에르주룸에서 약간 다르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튀긴 감자로 만든 반죽을 추가했고, 감자로 후식도 만든 적이 있다. 부서진 감자를 달걀에 살짝 담가 튀기고 거기에 달콤한 과즙을 넣어 실험해서 만들었다. [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바흐, 1995년 1월 23-30일]

온화한 성품

- 선생은 온화하게 보인다. 화를 내 본적도 있나?

– 나는 보통 너무 조용하고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은 “밧줄을 그의 몸에 매어 놓으면, 물 있는데 까지 몰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예민하여, 가끔 화 날 때가 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한다.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화를 혼자 삭인다. [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흐바, 1995년 1월 23-30일]

리더십?

- 선생은 데르비시 종교체계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선생의 리더십에 대해 설명해 달라.

– 내가 지도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는 보통 사람 일 뿐이다. 지도자는 능력, 천재성, 카리스마, 훌륭한 성과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질이 나에게는 없다.

– 겸손하다고 현실이 바뀌어지나? 선생의 이름을 따라 한 집단이 형성되면, 자동적으로 그 지도자가 되는 것 아닌가?

– 내가 30년 동안 강단에서 나의 사상을 표명해왔고,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고 그런 사상이 호응되어 왔기 때문에 “지도자”리는 호칭을 사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대입 준비 과정을 개설하고, 학교를 열어 교육 환경을 늘리길 바란다”고 나는 말했고, 그들은 나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잘 못 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주장을 따랐던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지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의견에서 만난 것이다. 내가 “학교”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대해 호응하여 말하는 것을 보아왔다. 또한 다른 문제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나의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간혹 경제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그런 문제에는 전문가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여 전문가에게 돌려보낸다.

- 선생의 저술과 설교에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고생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 자신은 고생을 겪었고, 이제 사람들은 엎드려 선생의 손에 입을 맞춘다. 어떻게 생각하나?

– 매우 불편하게 느낀다. 나는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바흐, 1995년 1월 23-30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

- 운명의 거울을 보면서, 선생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

– 거울에 내 자신과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나는 진정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보통 사람이다. 청년 시절에 내가 매우 존경한 알와르이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제르바이잔 억양으로 자주 말했다. “모든 사람은 선량하고, 나는 나쁘다. 모든 사람은 밀이고, 나는 밀짚일 뿐이다”. 나도 항상 같은 말을 하고 싶다. [누리예 아크만, 일간지 사바흐, 1995년 1월 23-30일]

페툴라의 추종자

– 선생은 “페툴라지”(Fethullahçi, 페툴라의 추종자)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좋든 싫든 선생에 가까운 사람은 페툴라지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우리를 데르비시 계층으로 생각한다. 또한 나를 “종교 조직의 지도자”로 부르기도 한다. 페툴라지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용어 사용에 불편하다. 사실 지나 주 같은(-ci, cu) 접미사는 분파를 의미함으로 신경 쓰이는 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그런 정의를 내릴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타우히드가(이슬람 교리) 이슬람의 본질이며 바탕이기 때문이다. 일부 동양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잘 못하여 말하는 것처럼, 무슬림이 무함마드지(무함마드의 추종자)라고 불릴 수 없다. [엘투그룰 오즈콕, 일간지 후리옛, 1995년 1월 23-30일]

그의 작품세계

일생 동안, 페툴라 귤렌은 세속적 즐거움을 누린 적이 거의 없다. 독신으로 지낸 일생 대부분을 공부, 교육, 여행, 저술, 연설에 바쳐왔다. 귤렌은 20세기의 정신적 황무지에서 오는 사람들의 고통과 항상 같이 해왔다. 책뿐 아니라 저널과 잡지에도 기고하고 있으며, 스즌티, 예니 우미트, 야으무르, 파운틴 잡지에 사설을 쓰고 있다. 그의 설교와 담론은 수천 개에 달하는 테이프와 비디오 카세트에 녹음되어 있다. 또한 그의 기사, 설교, 오랫동안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많은 책이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그의 저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대에서 이슬람에 던져진 질문들, 수피즌 실행에서의 주요 개념의 에메랄드 언덕, 현 시대와 젊은 세대, 원칙: 방법의 등불, 시간의 황금 부분, 색을 통한 진리, 부러진 픽, 주기도문 해석, 사도 무함마드, 끝 없는 빛, 실낙원을 향해, 이슬람 신앙의 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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